“영국·포르투갈 동맹은 600년, 영·미 동맹은 100년 이상 지속됐지요. 미·일 동맹 역시 한 100년은 지속돼야 한다고 봅니다.” 몇 해 전 후나바시 요이치 전 일본 아사히신문 주필이 필자에게 한 말이다. 동맹이 오랜 기간 지속되길 바라는 것은 일본뿐만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이 없으면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도 없다” “한·미 동맹은 산소와도 같다” “100년은 지속될 동맹’ 같은 말들이 스스럼없이 오간다. 그만큼 미국과의 동맹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의미일 게다.
이상 징후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왔다. 진원지는 미국 대선 공화당 선두주자 도널드 트럼프다. “한국은 매우 부유하고 위대한 산업국가지만 (중략) 우리는 하는 만큼 공평하게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군함과 항공기를 보내고 기동훈련을 하는데도 돌려받는 건 전체 비용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발언이 시작이었다. 한국이 매년 부담하는 1조원 가까운 주한미군 주둔 비용 부담액은 푼돈에 불과하며, 한국이 계속 무임승차를 원하면 더 이상 여력이 없으므로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는 뜻도 내비쳤다. 더욱 압권인 것은 동북아에서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를 두고 남긴 말이다. “끔찍한 일이겠지만 그들이 한다면 그들이 하는 것이다.” 행운을 빈다는 비아냥도 따라붙었다.
한·미 동맹을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우리에게는 가위 충격적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결코 돌출발언이나 실수가 아니다.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고립주의 정서를 제대로 짚어낸 것일 뿐이다. 이제 세계경찰 역할은 그만두고 국내 문제에 올인하라는 유권자들의 정서다. 물론 워싱턴 주류사회는 트럼프의 이 같은 행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본선 당선 가능성이 아주 낮고, 당선된다 해도 ‘뼛속까지 기업인’인 실용주의자가 무모한 고립주의 정책을 펼 수는 없을 것이라는 희망적 전망이다. 만에 하나 고립주의 노선을 고집한대도 미국 내 여론과 의회의 반대, 주류사회의 저항에 부딪쳐 외교정책을 수정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이는 아전인수에 가깝다. 트럼프를 ‘포퓰리즘에 편승하는 정치 광대’쯤으로 치부하면 마음은 편하다. 그의 외교정책 공약 역시 선거철 한때의 수사학으로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솔직한 미국의 바닥 민심이 고스란히 깔려 있다. 로저 코헨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가 지적했듯이 불평등의 심화와 무너진 복지정책, 사라져 가는 중산층, 난무하는 금권정치, 일자리 해외 유출, 급증하는 청년실업, 반(反)이민 정서, 사회적 배제와 양극화 등이 한데 겹쳐 트럼프식 고립주의 외교정책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문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19861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