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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팬텀기 한국 오던 날-1969년

babyARA

13.09.20 02:22:27추천 6조회 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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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 미리 밝히지만 아래 글은 2009년도에 구 야후에 포스팅 한 글이다.

오로지 주변국 군사력과의 역학이나 보유한 무기가 발휘하는  전쟁 억제력이나 

국내 미래 항공 기술 개발은 전혀 외면하고 예산 확대 불가라는 극히

관료적인 이유로 스텔스 기 도입을 외면하려는 당국자들은 1967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영단과 후에 대한민국이 누린 그 효과가 

어떠했던 것이었는지를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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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팬텀기 한국 오던 날-1969년 

 

지금으로부터 40년 전,1969년 8월 31일, 국내 주요 신문은 아래와

같은 기사를 크게 실었다.

 

 


“팬텀기 6대 인수- 세계 네 번째 보유 어제 환성 속에 축하비행”

                              -공군 OO 기지에서 유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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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4 D 팬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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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그 잡는 도깨비[Mig Killer]로 불리던 하늘의 도깨비 F-4D 팬텀기

6대가 29일[1969년 8월29일] 오전 9시 55분 아침 햇살이 찬란한

우리의 영공에 태극 마크를 달고 그 웅자를 나타냈다.


지난 주초 미국 멕그게란 기지를 떠나 1만2천 킬로미터의 
태평양을 횡단,멸공의 임무를 띠고 새 임지인 한국에 날아왔다.


한국 공군은 이날로 미국 영국 이란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팬텀기 보유국이 된 것이다.


상공에서 대기 비행 중이던 00대의 F5A편대가 하늘의 왕자 팬텀기를 
맞아 얼룩 무늬로 단장된 팬텀 편대를 가운데 놓고 상하 좌우로

환영 비행을 했다.


이때 강 신구[姜信求]중령[35.조종간부 6기]이 조종하는 팬텀

1번기가 널찍한 날개를 상하로 서너번 흔들면서 답례를 했다.


팬텀 편대의 좌우로 거리를 좁힌 F-5A편대는 기지 지상 통제소의

지시에 따라 에스콧 비행에 들어갔다.


10시 35분 목적지인 00기지 상공에 나타난 팬텀기는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 함께 삽시간에 기지 상공에 저공으로 가로 지르며 하늘로

다시 치솟았다.


도입 된 팬텀F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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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생김새와 재빠른 움직임이 지상에서 기다리던 관중의 시야에

처음 드러냈을 때 환영식장에선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10시 48분 빅토리의 머리 글자인 V자 대형을 그리며 기지 동쪽 
활주로에 진입한 팬텀기 6 대는 차례로 터치 다운했다.


지상에 닿을 때마다 팬텀의 후미에서 퍼져 나온 낙하산 모양의 
감속 장치가 목화송이처럼 아름답게 퍼졌다.


드디어 ‘라인 업‘, 

케노피가 열리면서 강중령을 선두로 

헬멧을 벗어들고 만면에 웃음 띈 채 조종사들이 내려서자

김성룡 참모총장은 굳은 악수로 이들을 차례로 맞이했다.


팬텀기를 맞은 이날 공군00기지에는 임 충식 국방장관 
문 형태 합참의장,맥기히 미5공군 사령관 등 한미 
고위 장성들이 참석했다.

137961133643357.jpg


1969년 8월 31일  - 미공군 팬텀기가 축하 비행중이다.

[대구 기지 인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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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분들은 이 팬텀기의 도입이 뭣이 새삼스럽다고 옛 신문을 뒤지고

찾아내어 블로그에 올리고 호들갑을 떠냐고하실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40년 전 가난한 이 나라가 거금을 들여서 사들인 팬텀기는

60년대의 의심할 바 없는 세계 최강의 전투기였다.


일본도 독일도 이스라엘도 가져보지 못했던 그런 초고가의 
최신형 전투기를 그 때 아시아의 빈국 한국이 도입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져 보면 미얀마나 이티오피아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F35 라이트닝 스텔스 기를  전투기를 도입했다는 
것만큼이나 쇼킹했던 뉴스였다.


팬텀은 미 해군기로 개발되었지만 그 예상을 깬 막강했던 성능으로

미 공군에서도 채택했었던 범상치 않던 경력이 말해주듯 공중 전투나

육상 폭격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그 전투력은

월남전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했던 환상의 전투기였다.


항속 거리도 길었고 음속의 2.4배나 되는 빠른 속도에 2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의 4발 중폭격기 B-17과 같은 폭탄 적재량등,

팬텀을 능가할 전폭기가 그 당시 세계에 없었던 만능의 폭격기였다.

 

월남 상공의 팬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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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최신 전투기는 미국이 그 때까지 했던 것처럼 한국에 거저 주던 
낡은 군사 물자가 아니었다.

월남전이 격화 되어가면서 미국은 이미 월남에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파병했던 한국에 일개 사단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였다.


67년도에 미국의 사이러스 반스 특사와 한국의 최규하 외무장관이

합의 했던 것은 미국이 한국에 일 억달라를 국군 현대화 자금으로

제공하고 한국은 보병 일개 사단을 추가 파병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뒤 월남에 파병되었던 국군 보병 사단이 백마부대였다.

그러니까 초고가의 최신 전투기 팬텀은 그저 주어진 선물이나 
군사 원조 무기가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국 땅에서 
흘릴 피의 대가였다.


일억 달라는 그 당시로서 엄청난 액수의 거액이었다.

불과 그 2 년 전인 65년도에 한일 수교를 하고 일본에서 받은

무상 배상액이 3억 달라였다.


3억 달라는 아무 것도 없었던 한국이 경제 개발을 향해

시동을 걸 때 종자돈으로 적지 않게 유용하게 썼다고
할만큼의 거액의 규모였다.


이 거금을 바라보며 고장 많은 구식 장비에 애를 먹던 한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는 물론이고 경찰까지 침을 삼키며 로비를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심사숙고 끝에 대부분을 신형 전투기 F4D

팬텀기를 구입하기에 투입하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운영 기술의 하나는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고

한국의 빈약 했던 물적 자원을 집중 투입해서 승부를 거는 것이었다.


즉 선택과 집중의 기술에 능한 것인데 크게는 그의 집권 초기는

경제 부흥을 위해서 수출 산업에 집중했었고 후기에는 국가의

명운을 걸만큼 중화학 공업육성에 집중 했던 사실을 들수가 있다.


그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의 삼분지 일을 포항 제철에

투자해서 근대화의 초석을 닦은 것이나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거금인 일억 달라라는 목돈을 풀어서 푼돈으로 낭비하지 않고

집중해서 팬텀기를 구매함으로서 가장 유효한 전력화로 연결한 것도

이런 선상에서 볼 수있다. 

그 때 이 군 저 군 원하는 대로 나누어 줬으면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미리 국방장관에게 이 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이니 그리 알라는 지시를 내려 놓은 터였다.

 

그는 결국 국방 장관에게 팬텀기 1개 대대로 구입비로 6,800만불을, 비행장

개선비로 500만 달러를 쓰고 나머지 3,200만 달러는 육해군과 해병대 경찰들이

알아서 나누어 쓰라고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팬텀기 구매 결정은 한국 국방사에 기록해 둘 
최선의 무기 구매 또는 획득의 결단이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구입하는 무기 구매는 비즈네스에서

기업인들의 투자와 같다.


잘하면 투자금을 다 회수하고도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데

비해서 잘못하면 투자금 회수는커녕만회하기 힘든 큰 손해를 보고

패가망신을 면치 못한다.


거대한 예산을 써야하는 국방 무기를 잘 사면 그것은 국가 위기시

국토 수호의 최고 주역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막대한 국민의 세금 낭비만 
애물 단지 노릇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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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에서 대승한 뒤에 차지했던 요동 반도를 유럽 삼국의

강요로 다시 반환했던 일본이 러시아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국고의 바닥을긁다시피 하고 거금을 들여서 사온 영국과

이탈리아의 군함들은 러시아 함대를 격멸함으로서 투자금액의

몇 십 배를 상회하는 큰 투자의 재미를 보게 했다.

 

 

일본 제국함대 기함 전함 미카사-영국 빅커스 조선소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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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세월이 한참 지나 1930년대에 일본 해군이 국가 일 년 예산의
3%를 투입하는 건조비의 전함 야마도는 그 자매함 무사시와 함께 
태평양 전쟁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해 엄청난 낭비를 일본에 
강요하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그런 고가의 장비를 자살특공에 
투입해서 낭비의 극치를 달리는 종말을 맺고 말았다.

 

전함 야마토 - 같은 예산으로 세 척의 히류급 항공모함을 건조할 수가 있었다. 
전함대신 항공모함들을 건조했었다면 태평양 전쟁시 일본 해군의

큰 전력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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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와서도 무기 구매는 최선과 최악으로 나뉘는 것은 자연스럽다.

 

소국 이스라엘이 60년대초 없는 국가의 재원을 박박 긁어내어

구매했었던 프랑스제 미라주 전투기는 이스라엘에게 6일 전쟁의

승리와 영공 수호, 적지 폭격의 임무를 너무도 잘 완수 해냈고

나중에 이스라엘 전투기의 국산화에도 크게 이바지해서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미라주 투자로 본전을 몇 배로 뽑았다.

[이스라엘은 현명한 무기 구매에서 항상 주변국보다 한 수 앞선다.]

 

이스라엘의 미라주 트로와 -70기를 도입해서 크게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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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같은 중동국가 이란은 마구 굴러 들어오는 오일 달러를

주체하지 못해 엄청난 무기 사치를 했는데 이 때 사드린 미국의

최강 전투기 F14 톰켓 기 80기는 너무 정밀한 고가의 무기로서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부품 부족, 정비 한계와 훈련 부족으로 이라크와의

전투에서 그 고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를 못했었다.

원체 우수한 전투기라서 딴소리도 있었지만 하여튼 투자대비 효과는 별로였다.

이란이 이 돈으로 더 많은 팬텀기를 더 샀더라면 효율성이 훨씬 컸을 것이다.

 


 

 

이란 공군의 F1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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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기는 중고 구식기를 운영하던 한국 공군의 질적 수준을 
대폭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러나 그런 수준만이 아니었다.

 

팬텀 기의 도입은 그때 한국 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팬텀 기의 도입 보도는 우리 국군 발전사에서 계속 있어 왔던 다른

신형기들의 보도들과 다른 의미를 가지도 있다.

 

예로서 그 뒤 F16이나 F15를 도입 할 때도 메스컴은 이렇게 흥분했던 
감정으로 대대적인 보도를 하지 않았었고 국민들은

역시 팬텀이 올 때처럼 열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5,60년대의 한국의 사회 안팍에 안개처럼 떠돌았던 것은
무력감과 열등감과 도피감이었다.

 

그래도 60년대에 들어와서 경제개발이 발동이 걸렸고 잘 살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점점 가시화되기 시작한 때가 이 팬텀기가 
들어올 때이다.

 

일본도 대만도 가지지 못했던,세계 최첨단 전투기를 우리도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진국들처럼 보유 할 수도 있다는 긍지를 주었고

국민들의 사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국방 관련 홍보물이나 보도에 팬텀기 이상 더 많이

출현했던 인기 주연 스타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한국 공군이라는 앞에 팬텀 공군이라는 수식어가

20년 가까이 붙어 다녔을까 --

 

여기에 당시 60년대 후반 한국은 실질적으로 북한 김일성의 잦은

도발로 준전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국민들은 있을 수 있는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에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국민들은 그 무렵의 북한 전투기가 500기가 넘었었고 한국

공군의 전투기는 150기 밖에 되지 않는다는사실도 알고 있었다.

팬텀의 도입은 그런 불안감을 일소함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팬텀의 도입은 전략적 항공 
공격력을 한국이 보유하게 됐다는 점을 제일 크게 평가해야할 듯하다.


그때 한국 공군은 미군이 쓰다가 넘겨준 6.25때의 전투기 F86을 
아직도 다량 가지고 있었다.

 
F86세이버 - 한국 전쟁 공중전에서 주역을 했지만 너무 낡아서
한국 공군은 정비 유지에 큰 애로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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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이 다 되어가는 고물 전투기이고 압록강까지 겨우 가서 

20여분 머무르고 돌아 와야 하는 구식 전투기였다.

 

그러나 팬텀은 북한 전역은 물론 중국의 북경까지도

그 유효한 공격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전폭기였다.

 

홍위병들이 맹위를 떨치던 중국에서도 오로지 미군만이 갖는

이런 장거리 공격력을 가진 국가가 이웃에 나타난 것이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전략 무기의 의미는 적의 공격 의지 사전 억제라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팬텀기가 들어오기 일 년 전에도 월남식의

게릴라 전을 꿈꾸며 무장 간첩을 120여명이나 울진 삼척으로 
보냈었던 남한 적화에 대한불치의 과대 망상증을 앓고 있던 자였다.

 

그런 그가 남한의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군 현대화를 해나가는 남한이 이제는 침략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공격 할 가능성도 배제 못할군사적 강국으로 커가는 것을 
느꼈을 수도있다.

 

불치의 남한 적화병을 앓던 김일성에게 그때까지 이 팬텀기의 
도입처럼 충격을 준 남한의 최신 무기 도입은 없었을 것이다.

 

[그 뒤 F16기 도입 때 북한 방송이엄청난 광기를 띄고 악담을 
 해댔던 것을 생각하면 팬텀 도입 때도 북한 방송이 얼마나
 광란의 욕설을 뱉어냈을지 짐작이 간다.

 

 얼마 전에도 도입하지도 않았던 AH64아피치 공격 헬기 
 도입 이야기가 잠깐 방송에 비친 것만으로도 북한 방송의 
 아나운서는 게처럼 입에 거품을 품고 별별 욕을 다 해댔었다.

 정상적이 아닌 정신 구조를 물려받은 북한 수뇌부의 아킬레스 근이 
 무엇인지를보여 주는 히스테리다.]

 

6.25남침 때 북한이 100대가 넘는 전투기를 보유 했을 때 남한은

단지 연습기 10여 대 뿐만 보유했었다.

 

전쟁 중에 북한은 소련이 공여해준 미그 제트 전투기를 몰고

미 공군과 공중전까지 했던 북한은 55년도에야 겨우 미군으로

부터 이미 구식이 되어가는 F86을 물려 받은 한국 공군의

수준이 경멸스러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한국 공군이 일본도 가지지 못했던 F4팬텀기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들의 양적인 공군력 우위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팬텀이라는 전투기가 자신들이 보유했던 최신 전투기

미그 21을 월남 상공에서 박살냈던 가공할 전폭기였다.


 

월맹의 미그 2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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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팬텀이 들어 오고,그리고 팬텀 때문만은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그 뒤에 김일성의 남한 도발은 상당히 소규모화 했고 조심스러워졌다.


이스라엘은 한국보다 한 달 늦은 1969년 9월 팬텀을 도입했다.

이스라엘 팬텀은 그 해 11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 상공에서 음속을 
돌파할 때 발생하는 폭음인 소닉 붐으로 아랍세계에 팬텀의 데뷔를

예고 한 뒤에 1973년 욤 키프르 전쟁 전후에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의 선두에서 맹활약을 했다.


한반도에서 팬텀은 이런 실전의 무대 주인공 역할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남한 적화의 과대망상증 환자 김일성의 남침 심리를

묶어 놓았고 한국국민의국방신뢰를 확보했으며 한국 공군의 
수준을 크게 상향 시킴에어느 전투기보다큰 몫을 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팬텀기 구매 결단을 그 분의 업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차기 무기 도입 때[ 먼훗날
F22나 공격용 원자력 잠수함 같은 ]항상 해대는 비용대 효과니 
뭐니 하는 주판질을 넘어서 때로는 앞날과 주변을 거시적으로 
내다보는 전략적 안목도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위의 일화를 포스팅한다.

 

[뭐 내 자랑같지만 윗글은 오늘날 스텔스가 채택 되지 않았을 경우

 많은 국민들이 필히 표출할 불만을 미리 예견한듯하다.]

 

그가 팬텀대를 이끌고 도착했던 대구 기지에 신 성일 씨가 
환영 나갔던 사실도 보도가 되었었다.

 

 

이 신문 보도의 취재가 있던 날 팬텀기를 미국에서 몰고 한국에 온

팬텀대 지휘관 강신구 중령은 왕년의 영화배우 신성일[실명 강신영]
씨의 친형이다. 

.

나의 블로그에 그가 동생보다 더 잘생긴 미남이었다는

사실을 회고하는 같은 부대원이 남긴 댓글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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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01&pn=1&num=109 by 울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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